나의 레팅고 이야기

기도 네빌고다드

opener6 2022. 6. 23. 13:31
그대가 기도할 때 그대의 골방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그대의 문을 닫았을 때
비밀 속에 계시는 그대의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러면 비밀 속에서 보고 계시는 그대의 아버지께서
아낌없이 보상하리라.
-마태복음 6:6-

그대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대가 기도할 때 이미 받았다 믿어라.
그러면 그것들을 받게 될 것이라.
-마태복음 11:24-

기도는 가장 경이로운 경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자신의 목소리가 하느님의 귀에까지 닿게 하기 위해 공허한 반복에 그치는 중얼거림과는 달리,
기도는 의식의 깊고 고요한 정적 속에서 치러진 영적 결혼식에서 오는 희열이다.

기도의 진정한 의미는 하느님의 결혼식을 말한다.

결혼을 하게 되면 신부는
자신의 성을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른다.
이처럼 기도하는 자도
자신의 현재 이름, 즉 현재의 본성을 버리고 자신이 기도하는 것의 본성을 취한다.
이 결혼식을 치르는 방법에 대해서
복음서에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대가 기도할 때
비밀 속에 있는 내부로 들어가서 문을 닫으라.
그러면 비밀 안에서 보고 계시는 그대의 아버지가 그대에게 보상하리라.
-마태복음 6:6-

여기서 내부로 간다는 것은
신부의 침실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결혼식 첫날 밤, 신혼의 침실처럼
성스러운 방에는 오직 새신부와 신랑만이 들어가는 것처럼,
성스러운 기도의 시간에는
기도하는 자와 그가 바라는 것만이 들어갈 수 있다.
또 신혼의 방에 들어간 신랑과 신부는
단단히 바깥문을 걸어 잠그듯,
성스러운 기도의 시간에 들어간 자 역시
감각의 문을 닫아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완전히 차단해야 한다.
지금 그대가 사랑에 빠진 것(소망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들에 대해 의식의 문을 완전히 닫았을 때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이 영적인 결혼식의 다음 단계는 이 말 속에 명확히 드러나 있다.

그대가 기도할 때 이미 받았다고 믿어라. 그러면 그대는 받게 될지니

그대가 소망하는 모습이 이미 된 것에 대해, 혹은 원하는 것을 이미 가진 것에 대해, 기쁨에 넘쳐 깊은 명상을 한다면 기도의 두 번째 계단에 올라선 것이다.
그것으로 혼례와 첫날밤을 영적으로 치르게 된다.

기도 혹은 명상하는 동안 취해지는 수용적인 마음의 태도는 인상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형태이기 때문에 신부 혹은 자궁에 비유될 수 있다.
그리고 그대가 자신으로 생각하는 모습은
그대가 취하게 되는 성, 즉 자신으로 받아들이는 본성이고 이것은 수태를 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은 신랑이다.
그래서 결혼으로 성을 취하게 되면 처녀성을 잃는 것처럼,
그대는 이 잉태로 인하여 원하는 것의 본성을 취하면 현재의 본성을 잃게 된다.
그대가 마음속에서 응시한 것의 본성과 성을 취했다면 그대의 모든 세포는
그것이 되었다는 기쁨에 짜릿함을 느낀다.

이렇게 소망하는 의식을 얻게 되었을 때
존재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는 이 짜릿함은
그대가 혼례를 치르고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증거이다.

이 고요한 명상 속에서 깨어나 돌아왔을 때
그대가 남기고 떠났던 세상을 향해, 문은 다시 열린다.
하지만 이번에는 임신한 새색시가 되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변화된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로맨스는
다른 이들은 모르고 오직 그대만이 안다.
그럴지라도 얼마가지 않아
침묵의 시간 속에서 자신이라고 느꼈던 모습을 바깥세상에 드러낼 것이기 때문에
세상 역시 이 임신의 증거들을 보게 될 것이다.

세상의 어머니이자 주의 신부는
의도적으로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붙여졌고, 그 뜻은 물이다.
왜냐하면 물이 다른 것과 함께 섞이게 되면 물의 성질을 잃는 것처럼,
마음의 수용적 태도를 말하는 마리아도
원하는 것의 본성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의 정체성을 반드시 잃기 때문이다.
지금 자신을 둘러싼 한계와 정체성을
기꺼이 던져버릴 수 있는 자만이
원하는 것들과 하나가 될 수 있다.

기도는 이런 본래의 가족과의 헤어짐,
그리고 결혼에 성공하는 공식이다.

둘이 어떤 것에 대해 뜻을 같이 한다면
그것은 이 땅 위에 세워지리라
-마태복음 18:19-

여기서 말하는 둘은
그대라는 신부와 소망하는 것이라는 신랑이다.
이렇게 둘이 뜻을 같이 했을 때
이 결합의 증거를 가져오는 아들은 태어날 것이다.
그대는 자신이라고 인식한 모습이 되고,
자신이 가졌다 인식한 것을 소유한다.
그때 더 이상 기도를,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하느님에게 간청하는 것' 으로 보지 않고,
'그대자신을 원하는 모습으로 인식하는 것' 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하느님에게
계속 간청하는 것이기에 응답받지 못한다.

의식이 곧 하느님이기에,
그대가 구하고자 하는 것을
의식 안에서 구해야만 한다.
이 일은 소망하는 것의 본성에 대한 의식을 사실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다.
오직 이 때만 그대의 기도는 응답될 것이다.

자신은 지금 가난하다 인식하면서
풍요롭게 되기를 기도한다면
그에게 돌아올 보상이란
오직 그가 인식하는 것, 바로 가난뿐이다.

기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간청이 아닌 주장이 되어야 하고,
나의 것으로 취해야 한다.

소망하는 것을 긍정하는 의식을
사실로 받아들이라.
그대의 욕망을 뚜렷이 한 채
고요하게 내부로 들어가
문을 닫아라.
그리고 그대의 소망 안에 푹 빠져
그것과 하나라고 느껴라.

그리고 그대는 이미 원하는 모습이고,
원하던 것을 이미 가졌다고
주장하고 느껴라.
이렇게 해서 그대가
소망의 생명과 이름 안으로 흡수되어 하나가 될 때까지
이 확고함 안에서 머물라.
기도의 시간이 마쳤을 때
그대는 예전에 원하던 존재가 되었고,
원하던 것을 가졌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걸어라 (기도편)
-네빌 고다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