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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친교

opener6 2022. 7. 29. 14:28

놓아버림 p86

 

 무의욕을 느끼는 상태는 '못해' 라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 마음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아니지만, 앞서 말했듯 대부분의 '못해'는 사실 '안 해'다. 마음이 이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못해'가 다른 감정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을 자각할 수 있으려면 자신에게 가상 질문을 던진다. " '못'하기보다 '안' 하는 것이 사실일까? '안' 하는 것임을 받아들이면 어떤 상황이 펼쳐지며 그 상황이 어떻게 느껴질까?"

 예를 들어 춤을 못 춘다는 신념 체계가 있다고 하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감추려는 거야. 사실은 하고 싶지가 않아서 안 하는 것이지." 감추려는 감정을 알아내는 방법은 춤을 배우는 자신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 보면 관련된 모든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쑥스럽고, 자존심 상하고, 어색하고, 새로운 동작을 익히느라 애쓰고,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는 것이 아깝다는 마음이 느껴진다. '못해'를 '안 해'로 바꾸고 나면 그 모든 감정이 드러나고, 그러고 나면 감정을 항복할 수 있다.

 춤 배우기란 자부심을 기꺼이 놓아 버림을 의미한다. 치를 대가를 살펴보고 이렇게 자문한다. "이 같은 대가를 계속해서 기꺼이 치를 것인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기꺼이 놓아 버릴 것인가? 배우는 사람 답게 버벅거릴 수 있도록 허영심을 기꺼이 놓아 버릴 것인가? 인색함과 왜소함을 놓아 버리고, 기꺼이 강습에 시간과 돈을 들일 수 있을까?" 관련된 모든 감정을 항복하고 나면, 진짜 이유는 거리낌에 있지 무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아주 명확해진다.

 

 

 호박사님께서는 춤을 예시로 들으셨는데, 춤을 추어본 나는 상대방과 물 흐르듯 함께 동작을 할 때 얼마나 기쁜지 안다. 또한 뻣뻣한 상대와의 느낌도 안다. 나는 말하는 것에 장애가 있었다. 뻣뻣하고 떨리는 입을 풀기 위해  20대 때에는 종로에 있는 스피치 학원을 다녔는데,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에서 위로를 받았고 자신감으로 횡설수설 떠드는 말보다는 떨더라도 진심의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았다. 그렇지만 진심을 담는 것은 그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능력도 없을 뿐더러 호불호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중학교 때 특별활동을 줄 곧 미술반에서 했다. 나는 미술에 약간의 재능을 보였지만 미술 용품은 늘 챙기지 않았고, 친구 도화지를 빌리고, 물감을 빌렸다. 학년이 바뀌고 다소곳하고 얌전한 친구가 나를 보며 수줍게 웃는데, 금방 친해졌다. 그 친구는 말이 없었고 대화를 그저 웃음으로 떼웠다. 내가 뭐라고 떠들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 그 친구는 나를 기분이 좋게 했다. 한번은 그 친구가 컴퓨터 실로 나를 초대했다. 내가 잘 모르는 컴퓨터를 친구는 막 작동을 시키고 컴퓨터에 대해 자신감을 보였다. 수줍음 이면의 모습에 나는 친구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학년이 한 번 더 바뀌고 3학년이 되어 친구와 같은 반이 되었고 매우 반가웠다. 알고보니 친구는 공부를 매우 잘 했고  그 친구는 반장이 되었다. 가끔 보고 잘 모를 때에는 막 친한 사이처럼 되었는데 가까이서는 전처럼 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사건이 생겼다. 

 신체 검사날이었다. 속옷만 입고 체중을 달았는데 옷을 벗기를 주저하는 친구를 보았다. 마지 못해 옷을 벗은 친구의 팬티는 많이 헤어져 있었고 엉덩이가 다 드러난 상태로 몹시 부끄러움을 타고 있었다. 그 상황을 나는 재미있어하며 웃어버렸다. 왜냐하면 나의 상황도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나는 일이 잘못 되었음을 직감했다. 친구는 그 이후로 나에게 싸늘하게 대했고 나는 얼어버렸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한채 나는 학교를 나가는 날 만큼 안 나가는 날도 많아졌고, 시험치는 날 가출을 하는 등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다행인 것은 담임 선생님께서 배려해주신 덕분에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그 때 말해야 하고 놓아 버려야 할 감정들을 풀지 못한 채 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컴퓨터를 몹시 거부했다.

 

'친구야 미안하다. 내가 그 때 너의 떨어진 팬티를 보고 놀리려고 웃었던 게 아니었어. 내 삶도 너의 팬티만큼이나 너덜너덜한 상태였거든. 나는 그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고 그냥 바보처럼 웃었던 거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품고 있던 감정들을 내맡기지 못한 채 가까이 지낸 시간들 속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모두 빠져 있었다. 그렇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라고 하는 것들도 뭔가 참아야 하는 것이라 드는 생각들이었지 제대로 된 말들이 있지도 않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마음으로는 호박사님께서 말씀하신 <영적인 친교> 를 꿈꾸었지만 감정의 내맡기지 못한 상태로 말미암아 미묘한 통제욕으로 상대방에게 투사가 되어왔음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