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어떤 느낌이나 상태를 말이나 문자로 상대에게 전달을 합니다. 하지만 어떠한 단어나 문장에 대해서 각자의 체험이 다릅니다. 어쩌면 어떤 단어를 익히면 자신도 모르게 기성복 차림처럼 공통적으로 쓰인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나무라고 불리는 나무는 수천 수만 종인데 그저 나무라고 이름 붙인 것처럼 슬픔 또는 외로움을 나무라고 부르는 것과도 같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물가에 사는 버드나무와 한라산 중턱의 금강송은 엄연히 다르지만 둘 다 나무임은 확실합니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익힌 사람의 환경이 버드나무와 금강송처럼 다르다면 오해가 뒤따르고 이것으로부터 서로의 감정적 충돌이 생기는 듯 합니다. 다른 예로 남성과 여성의 태생적으로 좌우되는 성격적 차이에서도 무시못할 오해가 쌓여서 서로 다름에 끌리다가도 서로 다름에 이질감을 느껴서 싸움도 하고 결별도 합니다.
도가도 비상도의 뜻처럼
언어 이전으로 돌아가서 자신이 말하고 쓰고 행동하는 것을 다시금 볼 때라야 아하! 하고 깨달을 것만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 누군가의 말과 행동이 이치에 맞지 않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나의 세계관과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체감하기 까지는(아직 불안전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심각해 보이는 충돌들이 있어왔습니다. 마치 화성만한 크기의 테이아와 지구가 충돌해서 달이 만들어졌다는 가설처럼, 나와 나와는 다른 성질들의 사람들의 충돌들을 통해서 성장 발달해왔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같은 원자가 배열을 달리해서 다른 성질들을 보이지만 결국 같은 원자로 이루어졌다는 과학 이론에 고개를 끄덕이며 까닭없이 인정이 되어집니다.
누군가 자신과 잘 맞지 않는 사람을 마주하고서는 불편한 감정을 느끼면 "저사람 왜저래?" 라고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거나 비난할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성질의 성격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나의 어떠한 감정적 부분이 불편함을 겪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지만 수만종의 나무처럼 삶을 형성하고 있는 환경과 성격적 요소들이 다분히 다를 수 있음을 알아차린다면 이전처럼 충돌의 사태를 염려하는 가운데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할 일은 현저히 줄 것입니다.
요제프 크네이트의 이름을 빌어 헤르만 헤세가 쓴 시를 한편 옮겨봅니다.
<문자>
때때로 우리는 펜을 움켜쥐고서
하얀 종이에 기호를 쓰네.
이것저것 생각나는 것을 표현하네, 누구나 다 아는 것을.
그것은 규칙이 있는 장난.
그러나 야만인 혹은 달나라 사람이 와
그 종이 쪽지를, 꼬불꼬불한 르네 문자의 행렬을
신기한 듯이 눈앞에 끌어가 살펴본다면,
거기서 그를 쳐다보는 것은 낯선 세계의 형상,
낯설고 이상한 화랑이리라.
A와B가 인간으로서, 짐승으로서,
눈으로서, 혀로서, 손발로서,
저기서는 신중하게, 여기서는 본능에 몰려 움직임을 보리라.
눈 위에 난 학의 발자국을 보는 느낌이리라.
존재 가능한 온갖 생물이
움직이지 않는 검은 기호의 행간에 출몰하는 것을,
이어진 수식 사이를 지나가는 것을 보리라.
사랑에 불타고 고통에 경련하는 것을 보리라.
이 문자의 이어진 창살 속에서
맹목적인 충동에 몰린 세계 전체가
축소된, 마법으로 조그만 기호 속에 갇힌 형상으로 나타나리라.
기호는 부자연한 자세로 거닐며
서로 닮았기 때문에 생의 충동과 죽음, 환락과 고뇌가
거의 분간할 수 없는 형제가 되고......
그러면 마침내 이 야만인은
견딜 수 없는 불안으로 소리치고 불길을 북돋우고
얼굴을 쳐들어 기도문을 외며
수수께끼 문자 가득한 하얀 종이를 불길에 바치리.
그리고 그는 졸음 속에서
이 비현실의 세계가, 마법에 걸린 상태가,
참을 수 없는 것이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로 흡수되어 들어감을 느끼고
탄식하고 미소하며 기운을 되찾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