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둔 밤
어둔 밤
-십자가의 성 요한-
1
어느 어두운 밤에
사랑에 타 할딱이며
좋을씨고 행운이여
알 이 없이 나왔노라
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
2
변장한 몸, 캄캄한 속을
비밀 층대로 든든하이
좋을씨고 행운이여
캄캄한 속을 꼭꼭 숨어
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
3
상서로운 야밤중에
날 볼 이 없는 은밀한 속에
빛도 없이 길잡이 없이
나도 아무것 못 보았노라
마음에 속타는 불빛밖엔
4
한낮 빛보다 더 탄탄히
그 빛이 날 인도했어라
내 가장 아는 그분께로
날 기다리시는 그곳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그쪽으로
5
아, 밤이여 길잡이여
새벽도곤 한결 좋은 아, 밤이여
굄하는 이와 굄받는 이를
님과 한몸 되어버린 괴이는 이를
한데 아우른 아하, 밤이여
6
꽃스런 내 가슴 안
오로지 님 위해 지켜온 그 안에
거기 당신이 잠드셨을 때
나는 당신을 고여드리고
잣나무도 부채런 듯 바람을 일고
7
바람은 성 머리에서 불어오고
나는 님의 머리채 흩어드릴 제
고요한 당신이 손으로
자리게 내 목을 안아주시니
일체 나의 감각은 끊어졌어라
8
하릴없이 나를 잊고
님께 얼굴 기대이니
온갖 것 없고 나도 몰라라
백합화 떨기진 속에
내 시름 던져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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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릴케의 시를 읽다가
습관적으로 그의 삶을 추적 하다가 책을 덮고 말았다.
영혼의 시
어둔 밤의 첫 대목,
<사랑에 타 할딱이며>
그 대목에서 릴케는 그야말로 사랑에 불타 할딱거리는 듯 보였고,
그 것은 릴케라는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인물이 아니라
나의 모습이었기에 헤프기 짝이없는 마음의 한 구석을 비쳐주었기 때문이었다.
뜨거워 진 영혼에
몸 마저도 발가스레 달아 올라
주체할 수 없이 내달리는
끝없는 청춘을 갈망하는 욕구
그 것을 모다 태워버리지 않고서 살려둔 욕구
그 것을 붙들어 끝장내 주실 분을
구하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영혼을 의지할 자리를 찾은 이
스스럼 없는 표현까지도
과감하다.
신의 봄 앞에서는
모든 것이 자연스러우며
낯 뜨겁게 여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나온 것이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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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십자가의 성 요한님께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사랑에 타 할딱이며... 표현을 굳이 야하게 표현해야 했을까? 원문을 모르니 번역에서 갖가지로 의역할 수도 있겠지만, 이 표현에 약간은 낯 뜨거워지긴 하네.
<친구> 뭐가 낯 뜨거운데? 그런 말들이 도는 것을 보긴 했지만.
<나> 아니 뭐... 할딱인다는 표현은...
<친구> 고양이도 한참 놀아주면 좋아서 할딱거리고, 사람도 뭐 좋으면 할딱거리잖아.
<나> 애두를 것없이 직설적인 표현이긴 하네.
<친구> 영혼에 의식을 둘 것이냐, 몸/마음에 의식을 둘 것이냐, 이 두가지 관점에서 분명할 필요가 있지. 영혼에 의식을 두고 시를 읽는다면 시의 의미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무엇인지 분명해질뿐더러 마음의 헤맴을 그럴싸하게 표현한 것들에서 한껏 놀아나는 것으로의 밤 놀이 가듯 한 것에 시들해지겠지.
<나> 그렇지, 밤 놀이. 그 밤 놀이를 실컷 동경한 적도 있었지.
<친구> 어둔 밤의 진짜 의미는 사랑에 타 할딱이던 그 한 때를 놓아보내는 것이야. 그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알아차리기 때문인데, 바로 불멸의 넥타를 마신 것이지. 하느님께서 주신 큰 사랑의 숨결을 느끼게 되면, 몸으로 느끼던 감각들은 하찮은 것이 되어버리고, 신을 갈망하는 영혼과 할딱거리는 마음을 떨쳐내려는 두 마음 사이에서 어둔 밤을 겪는 것이지. 악마라고 불리는 에고의 전형성은 신께로 내맡겨지는 마음을 몹시도 껄끄러워하거든. 영혼이 무르익는 어느 단계까지 들어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펼쳐지는 악마의(에고의 전형성) 방해 공작을 무던히 견뎌내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지. 완전함 속에서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역설을 이해하려면 지성의 탄탄한 힘도 필요하고, 마침내 지성 마저도 바침으로써 영혼의 문을 통하게 되는 것이지.
<나> 마지막 소절에 / 백합화 떨기진 속에 내 시름 던져 두고 / 이 표현은 부처께서 들어보이신 꽃에 미소짓는다는 염화시중이 떠오르네.
어둔 밤은 어쩌면 호박사님의 표현으로 역경이 아닐까?
역경은 이전에 거부되고 무의식 속에
억눌린 것들의 결과로 보입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이 함축된 두줄의 의미,
억눌린 것들에 대한 탐구는
오늘의 말씀처럼
연민을 통하지 않으면 불가능 할 것이다.
신께 간구하며, 영혼에 힘 입을 때에
비밀스런 앎의 힌트가 주어질 것이다.
깃털 하나 올려 놓는 무게감을 알아차릴 때,
저울은 영혼 편으로 기울어짐이라
어느 편도 없건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