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과자
친구가 빵을 구웠다. 그런데 빵이 아니었다. 빵은 글루텐이 잡혀서 질긴데, 친구가 구운 빵은 폭신한 것이 사르르 녹았고 카스테라처럼 찐득거리지도 않았다. 다양한 견과류와 곡물들을 넣었고 계피 향이 살짝 났다. 내가 딱 좋아하는 식감과 맛과 향으로 먹는 동안 행복했다.
<친구> 어때?
<나> 기가 막힌데, 정말 맛있고 식감도 좋아. 어떻게 만든거야?
<친구> 비밀이야.
<나> 그런데 말이지. 이렇게 맛있는 것을 만들고 먹는 것에 대한 애착과, 세상에 대해 초연해지는 것에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 나의 눈은 유럽 대성당의 멋진 건축물을 동경하는데, 지금 다니는 성당은 예술성을 기대할 수가 없네. 이처럼 입이 미식을 탐하는 것에서 어떻게 거둠 기도와 연관을 지을 수 있을까?
<친구> 흠뻑 빠지면 홀가분하게 나올 수 있지! 마음이 지금에 없고 딴 데 있어서 그래.
<나> 그럴까?
<친구> 이치를 하면 미련을 남기지 않는 법이지. 신께서 주시는 만나를 어설프게나마 이래저래 만드는 것이 삶에서의 과제라고 봐. 그게 아무리 멋지고 만족스러워 보여도 영혼의 눈을 뜨고 보는 것에는 비길 바가 아니거든. 손 때가 묻고 닳도록 애지중지 하던 것도 영혼의 것을 본다면 애들 장난감처럼 휙 던져버리게 되는 것이지. 세상 사람들이 보는 시야에서는 피리부는 사람 따라가는 철부지 아이들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진실은 아주 다르지.
<나> 그런데, 이 빵도 아닌것이 과자도 아닌것이 정말 맛있네.
<친구> 오관을 거둘 줄 알고 진짜 기도를 터득하면 세상적인 것은, 음식의 맛은 아주 조금만으로도 만족 할 수 있어. 과자들이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수도원에서야. 수도원에서 기도를 통해 아이디어들을 얻어서 과자도 만들고, 술도 빚고, 그랬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나> 커피도 수도사가 발견하고 기도에 바쳐지고 했었다고 하지.
<친구> 세상의 발견들은 맑은 영으로부터 전수받는 것이라고 본다면, 배워서 익히고 원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나온 것으로 닿게 마련이거든. 오관을 즐기려고 하는 것에는 끝없는 쾌락으로의 중독스런 덫이 있기도 하지만, 길 잃은 영혼이 저이 갈길 위로 안내를 받고 나면 후회를 떨치고 배우고 익히기를 시작하게 돼.
<나> 내 말이... 배우고 익히기를 저항하는 것을 보노라면 부대낌이 올라와.
<친구> 강요할 수는 없는 거야. 누구나 저마다의 감내할 수 있는 정도로 배움이 있는 법이지. 슬픔이라는 감정 조차도 배워서 익혀야하는 경험이 부족한 영혼들도 있는 거야. 자만심을 내려놓기가 죽기보다 싫은 사람도 있지. 저마다 배워야할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과자를 만들어 보라느니, 커피를 해보라느니 하면서 간섭해서 될 일은 아닌 것이지. 당사자가 스스로 해보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 볼 필요가 있겠지.
<나> 아하! 당사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을 빼먹었네.
<친구> 누구나 원하는 것이 있지. 그 것이 무엇인지 서로 간과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숨기고 상대를 조종하려드는 태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나> 아니 그것은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은데...? 내가 상대에게 원하는 바를 분명히 전달하고 상대가 원하는 바에 대해서 똑부러지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
<친구> 이런 어리석은 사람을 보았나! 그럼 지금까지 도대채 무슨 생각으로 살아왔단 말인가?
<나> 커피만 잘 내리면 사람들이 맛난 커피 마시려 몰려들 줄 알았지. 뭔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겠군.
<친구> 사람들이 자기 감정에 취하면 참 맛도 모른다네. 다시 말하지만 쾌락을 쫓는 이유는 고통을 회피하려고 하기 때문이지. 고통에 정면으로 서는 것을 강요하진 말게나. 배우고 익힌다는 것은 그만큼의 고통스런 부대낌을 수반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알아야 해. 모든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배움에 임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였으면 해.
<나> 부대낄 수밖에 없었네...
그나저나 과자는 정말 맛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