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레팅고 이야기

나는 왜 몸을 사렸을까? 2011.07.29

opener6 2013. 4. 13. 12:16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송아지를 코뚜레 꿰듯 밭에 끌려 나갔다.

 

한창 티비의 뭔가를 기다렸던 것 같은데 누나가 내 손을 끌고 고추밭으로 갔다.

 

기억에 떼를 쓰며 울었고, 소용이 없었다.

 

모르긴 해도 이제 일손을 거들어야 할 나이가 되었음에 그 당시 충격이 컸었지 싶다.

 

이후로 농번기에는 학교 조퇴를 하고서라도 농사일을 도와야했다.

 

3~4월은 하교후 비닐하우스 모종 관리를 해야하고, 감자를 심는다.

 

5월의 어린이날은 고추를 심든 담배를 심든 했고, 주말은 깨 씨를 넣는다.

 

6월엔 모내기를 했고, 담배 모종에 흙을 얹어야한다.

 

7~8월 특히 이무렵 한창 담배를 따고 쪄서 말리는데 방학과 겹친다.

 

부모님이 따 놓은 담뱃잎을 나르는 역할을 했는데 푹푹 찌는 날씨에 키보다 더 큰 담뱃잎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다.

 

지금 생각해도 그 일은 넌더리가 난다.

 

수시로 때가 되면 인삼밭, 고추밭을 뒤덮는 세상에 가장 불필요한 생물처럼 여겼던 풀을 뽑아야 했다.

 

겨울 방학엔 땔감을 하러 어른들 틈에 껴서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러 골짜기를 다녔고,

 

봄방학이면 채 녹지 않는 땅에 동생과 함께 비닐을 걷으러 다녀야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동네의 아이들이 나와 똑같은 처지거나 더 열심히 일손을 거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소원은 탈 고향이요, 대학을 나오거나 말거나 돈 많이 벌어서 고생 안하고 사는 것이었다.

 

촌에서 자란 친구들이 모두 그렇듯 고향을 등지고 설로 올라왔다.

 

 

 

그런데...

 

뭘 해서 돈을 많이 벌 것이냐.

 

힘든 일은 무조건 싫었다.

 

스무살 무렵 어느날 길을 가는데

 

어떤 가게에 인테리어 공사 현장을 목격했다.

 

먼지가 이만 저만이 아닌 가게 안을 보며 내가 할 일은 아니다. (라고 생각했던 그 일이 지금의 나를 불렀다.) 

 

자동차 정비는 기름 냄새가 싫었고, 공장일은 폼이 안났다.

 

나는 폼 잡는 일을 택했었다.

 

그래서 사진 기술을 배우기로 했다.

 

처음 카드를 발급받아서 긁은 니콘 F3 카메라를 들고 친구들 앞에서 했던 자랑질은 지금도 선하다.

 

그리고 그 길로 몇년을 달리다가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가 한참 헤매어 지금까지 20년을 왔는데...

 

그 20년 전 피하고 싶었던 일을 지금 시작하는 것일까?

 

 

 

얼마전 전설의 곰빵꾼들을 보았다.

 

3,4 층으로 모래를 져올리고 있었다.

 

그들의 물찬 생선 같은 종아리를 보았다.

 

펄떡이는 물고기 같은 움직임을 보았다.

 

그 순간

 

'힘들겠구나.' '힘들것이다.' 라는 생각이 끊어졌다.

 

평생을 쫓아왔고 도망 다녔던

 

'삶은 힘든 것이야!' 라는 생각이 삭제 되었다.

 

 

 

오늘 수천만개의 먼지를 날리고 마시며 합판을 켜는 일이 있었다.

 

십여분을 넘어가자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었고 마스크를 찾았지만 없었다.

 

하지만 반장님은 대수롭지 않게 일을 진행했고 삼십분 정도 되어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먼지 구덩이가 몸에 해로울 거야!' 라고 먼저 생각을 한다면 아마 지쳐서 일이 피곤해질 것이다.

 

또한 며칠째 수 차례의 디자인 변경이 있음에도 귀찮아 하지 않고 요구 사항을 잘 담아낸다.

 

그동안의 삶의 환경을 벗어난 곳에서 자신의 일에 이렇게도 열중을 할 수 있구나를 보고 배운다.

 

 

 

그간 나는 자신이 몸을 사리는 줄 모르고 있었다.

 

알았더라도 두려워서 뛰어들지 못했을 수 있다.

 

이제 낼 모래 개학의 방학 숙제 하는냥 내 몰린 지 모르겠다.

 

하지만,  참 열심히 사시는 분들의 도움으로부터

 

또아리 틀고 있던 마음이 풀려 가면서 몸에 갖혀있던 의식이 풀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