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레팅고 이야기

억눌린 자아 표출의 시기 2011.09.20

opener6 2013. 4. 13. 12:35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가지게되고 향상을 지향하다보면 억눌린 자아의 표출의 시기가 있습니다.

이때의 감정은 감옥에서 석방되거나 탈옥하거나 면죄부를 얻은 희열과도 같습니다.

낮은 의식 단계에서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 감정에 자아도취 되기도 하며,

무한한 사랑이 샘솟고, 모든 것을 알아보는 듯한 착각도 느낍니다.

생전 처음 자신의 존재감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때의 자아는 용기처럼 보이는 해방감으로 평소의 억눌림으로 하지 못했던 돌발 행동들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은 어떤 사람이나 단체로부터 지극한 관심을 받을 때 일어나곤 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다고 여길 때 각별히 일어나곤 합니다.

이런 현상은 더 진화된 의식으로의 도약에 좋은 요소라고 할 수도 나쁜 요소라고 할 수도 없고,

그저 자신의 점진적으로 정화되어야 할 카르마가 한 순간 과도하게 표출되어서 일어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면,

저의 누나가 교회에 나갔다가 주님의 은총을 입고 한동안 교회에 헌신했으며,

저의 동생이 정신적 이상을 겪었을 때 그랬다가 주님의 사랑으로 정상적 삶을 유지하게 되었었습니다.

저도 10여년 전 생전 처음 느껴보는 관심의 따스함으로 인해 꽃피는 봄날을 맞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끄럽지만 그 때, 세상이 아름다웠고,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니는 ㅁㅊ년처럼 행동했었지요. ㅎㅎ

 

 

이런 이상 현상을 겪지 않기위한 방법을 최근에야 어슴푸리 알게 되었는데요,

그것은 진실한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멘토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멘토는 자신이 간절히 원해야 인연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높은 의식으로 진보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볼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모든 행동거지를 면밀히 모니터링 할 수 있어야하는데,

쫒기듯 바쁜 삶 속에서 그 삶들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 무의식적으로 지나가다가

기도와 참회의 시간을 가진들, 그것은 문맥도 맞지 않고 어법도 틀린 형식의 글을 쓰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모니터링은 정말 필요한데요, 행위는 카르마의 나타남이요 의식의 수준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기 자신을 볼까요.

나가수에 출연하거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출연하거나, 어디 오디션에라도 나가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자신을 카메라가 있는지 없는 모르고 행동될 때까지 촬영해달라고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자화상을 그린다거나, 자신을 캐리커쳐 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일주일을 자신을 관찰한 후 놀랍게도 자기 자신의 특징을 자화상으로 표현 할 줄 아는 곳도 있습니다.

물론 자신의 내면을 봄으로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에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고 설명해 줄 수 있는 진실한 조언자가 가장 자신을 보는데 적합할 것입니다.

 

 

' 나는 무엇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 라는 어떤 문귀가 떠오르는데요,

이는 십우도의 소 찾는 과정과 같아보입니다.

십우도의 소는 에고를 찾아서 길들이고 마지막으로 놓아주는 과정으로 해석됩니다.

이렇게 의미 심장한 그림이 소를 찾고 나서 아홉장이나 펼쳐지는데요,

소년이 소를 찾고 나서 기쁨에 겨운 나머지 소 자랑하느라고 온 동네 다니는 것은 제가 부끄러운 일입니다.^^

 

 

오늘 제가 그 소에 코뚜레를 좀 뚫어 드리고 싶은 마음을 눌러가며 글을 좀 길게 썼습니다.

널리 양해하시고, 기쁘고 거룩한 밤 되십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