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동안은 현실의 삶을 타개하려는 목적에서 정신적 영역을 흘끔거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실은 영혼이 나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삶이 평탄했더라면 불만조차 품지 않았더라면 마음의 엉킨 실타래는 존재하지 않았고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았을 것이다.
인생의 어느 시기가 되면 삶의 역경이라는 부분도 수용이 되어진다.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완전히 망가진 것처럼 보이는 심각한 수준의 자아에서 영혼의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온다. 진실로 진실로 자아가 찾아 헤맨 것은 참자아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하면 유다처럼 스스로 숨을 죽인다.
강인한 영혼들은 매우 심각한 수준의 모습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영화 엘리펀트맨처럼 태어날 수도 있다. 다운증후군, 자폐아, 정신질환, 심각해보이는 중독증상, 중병에 걸려서 일찍 삶을 마감하는 눈 맑은 아이들. 이들은 삶의 목적을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세상에 온 것이다. 영혼과 소통하지 못하는 자아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 상태들을 대면하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놓이게 된다.
영혼이 목적하는 바는 파동함수의 붕괴이다. 자아가 붕괴되어 거듭나지 않을바엔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성공이라는 것도 물질적 누림이 전부는 아니지 않는가? 가난했던 사람은 가난에 대한 모든 신념체계를 떠나보내야 부자가 된다.
부자의 신념체계 즉 금수저로 태어난 사람은 영혼의 의도에 의해서 몽땅 말아먹는다. 무슨 문제란 말인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에서 문제라고 인식하는 것은 바뀌지 않는 자아의 안주일 뿐이다.
토마토가 라구소스가 되듯이 우리의 자아는 극심해 보이는 스트레스를 맞이한다. 타들어가는 고온의 열과 으깨지는 고통과
다른 성분들과 마구잡이로 섞이는 듯한 수모와 사람의 입으로 사라지는 존재의 절망을 경험할 것만 같다. 자아를 토마토라는 하나의 대상에 비유해보는 것처럼 이 세상은 토마토로 존재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 하지만 훌륭히 만들어진 라구소스를 맛보면서 그 누가 토마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자아는 그제야 비로서 영예로운 명예로 기려지는 것이다.
인생의 어느 시기가 되면 삶의 역경이라는 부분도 수용이 되어진다.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완전히 망가진 것처럼 보이는 심각한 수준의 자아에서 영혼의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온다. 진실로 진실로 자아가 찾아 헤맨 것은 참자아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하면 유다처럼 스스로 숨을 죽인다.
강인한 영혼들은 매우 심각한 수준의 모습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영화 엘리펀트맨처럼 태어날 수도 있다. 다운증후군, 자폐아, 정신질환, 심각해보이는 중독증상, 중병에 걸려서 일찍 삶을 마감하는 눈 맑은 아이들. 이들은 삶의 목적을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세상에 온 것이다. 영혼과 소통하지 못하는 자아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 상태들을 대면하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놓이게 된다.
영혼이 목적하는 바는 파동함수의 붕괴이다. 자아가 붕괴되어 거듭나지 않을바엔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는단 말인가? 성공이라는 것도 물질적 누림이 전부는 아니지 않는가? 가난했던 사람은 가난에 대한 모든 신념체계를 떠나보내야 부자가 된다.
부자의 신념체계 즉 금수저로 태어난 사람은 영혼의 의도에 의해서 몽땅 말아먹는다. 무슨 문제란 말인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에서 문제라고 인식하는 것은 바뀌지 않는 자아의 안주일 뿐이다.
토마토가 라구소스가 되듯이 우리의 자아는 극심해 보이는 스트레스를 맞이한다. 타들어가는 고온의 열과 으깨지는 고통과
다른 성분들과 마구잡이로 섞이는 듯한 수모와 사람의 입으로 사라지는 존재의 절망을 경험할 것만 같다. 자아를 토마토라는 하나의 대상에 비유해보는 것처럼 이 세상은 토마토로 존재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 하지만 훌륭히 만들어진 라구소스를 맛보면서 그 누가 토마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자아는 그제야 비로서 영예로운 명예로 기려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