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레팅고 이야기 93

누에나방

한 밤중에 시렁에서 누에가 서걱서걱 부지런히 뽕잎을 갉는다 꼼질꼼질 요란도 하다 그것 밖에 모르는지라 어느새 손가락 만큼 부둥부둥 하게 징그럽던 녀석이 숨 죽여 곱고 질긴 비단실을 게운다 쉼 없이 세심하게 실을 잣는다 미련 없이 입장 없이 알맞게 지은 고치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조바심을 잠재우고 이전의 모습을 잊히우고 꿈에서 깨어나면

친구의 과자

친구가 빵을 구웠다. 그런데 빵이 아니었다. 빵은 글루텐이 잡혀서 질긴데, 친구가 구운 빵은 폭신한 것이 사르르 녹았고 카스테라처럼 찐득거리지도 않았다. 다양한 견과류와 곡물들을 넣었고 계피 향이 살짝 났다. 내가 딱 좋아하는 식감과 맛과 향으로 먹는 동안 행복했다. 어때? 기가 막힌데, 정말 맛있고 식감도 좋아. 어떻게 만든거야? 비밀이야. 그런데 말이지. 이렇게 맛있는 것을 만들고 먹는 것에 대한 애착과, 세상에 대해 초연해지는 것에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 나의 눈은 유럽 대성당의 멋진 건축물을 동경하는데, 지금 다니는 성당은 예술성을 기대할 수가 없네. 이처럼 입이 미식을 탐하는 것에서 어떻게 거둠 기도와 연관을 지을 수 있을까? 흠뻑 빠지면 홀가분하게 나올 수 있지! 마음이 지금에 없고 딴 데 있..

환상지

원효대사님의 해골바가지 깨달음을 듣고서 처음 반응은 제가 해골의 썩은 물을 마신 것처럼 속이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해골에 고인 더러운 물을 마시는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사님께서 다음날 일어났을 때에 그 것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대목에 대해서는 아하! 하고 당장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알것도 같은 느낌은 있었습니다. 그 때 당장 아하! 했었더라면 저의 삶은 그 시점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상징과 비유와 은유에 대하여 사색을 해봅니다. 원효대사님 일화의 해골의 썩은 물이란 지금 머릿속에 든 오랫동안 고여서 썩다싶이한 고정관념들이요, 그것을 마시고 달게 느꼈던 것은 자아가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아내는 단물이요, 다음날 아침은 그러하게 살아온 삶을 인식한 깨달음이자 다시 태..

자린고비 / 강연 <돌이켜 볼 때>

보통 우리는 지혜가 없습니다. 돌이켜볼 때를 제외하구요. 돌이켜볼 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얻었는지 볼 수 있습니다. 한계로 보이는 것은 사실 도약대이자 도전이었습니다. -2004 / 04 / 22라디오 강연 일부 발췌- ----------------------------- 이제 나눔이 뭔지 좀 알 것 같네! 오! 정말 다행스런 일이군, 자네같은 자린고비는 또 없을꺼야. 내가 좀 인색하긴 하지? 먹음직스런 굴비를 매달아 놓고 쳐다보지도 못하게 했지 아마도? 코라도 킁킁거릴까봐 냄새도 못 맡게 하고, 침이라도 고일라치면 난리를 치는 성미지 자네는. 내가 정말 그정도란 말인가? 이제 매달아 놓은 굴비를 내려야겠네. 돌이켜보니 이십여년 전의 사건이 떠오릅니다. 2년 정도 어느 공동체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새술은 새부대에

고등학교 때 기타를 멋지게 쳐서 인기를 받고 싶은 욕망이 일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과 막걸리를 먹으며 부르던 노래들은 트로트 메들리였습니다. 욕망이 뿌리내릴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고물 기타가 생겼는데 다음 순서로 어찌할 바를 몰랐던 욕망은 금새 말라 죽었습니다. 배울 선생님도 없었을 뿐더러 제대로된 조율법도 모른채 줄을 당기다가 끊어지면 바로 절망이 왔습니다. 기타 줄 뿐만 아니라 전반적 삶에 스페어란게 없었습니다. 서울에 올라온 20대 초반 어느날 기타에 절망했던 지난날이 떠올랐습니다. 당장 낙원상가에 달려가서 기타를 샀습니다. 튜닝 기능이 내장된 고급스러운 기타로 질렀고, 끊어먹지 않으려고 기타줄도 비싼걸로 두벌을 구입했습니다. 학원도 끊었습니다. 처음엔 열심히 연습하다가 직장을 옮기고 이사를 가고 ..

문자

어떤 느낌이나 상태를 말이나 문자로 상대에게 전달을 합니다. 하지만 어떠한 단어나 문장에 대해서 각자의 체험이 다릅니다. 어쩌면 어떤 단어를 익히면 자신도 모르게 기성복 차림처럼 공통적으로 쓰인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나무라고 불리는 나무는 수천 수만 종인데 그저 나무라고 이름 붙인 것처럼 슬픔 또는 외로움을 나무라고 부르는 것과도 같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물가에 사는 버드나무와 한라산 중턱의 금강송은 엄연히 다르지만 둘 다 나무임은 확실합니다.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익힌 사람의 환경이 버드나무와 금강송처럼 다르다면 오해가 뒤따르고 이것으로부터 서로의 감정적 충돌이 생기는 듯 합니다. 다른 예로 남성과 여성의 태생적으로 좌우되는 성격적 차이에서도 무시못할 오해가 쌓여서 서로 다름에 끌리다..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렴의 계절로 접어들며 책과 음악의 시선을 빌어 저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배움에 대한 저항감을 내려 놓으니 책들이 읽어지기 시작하고 음악도 들어지고 이웃 사람들에게 투사했던 감정들도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소개드릴 책은 어느 뇌과학자가 실제로 뇌출혈이 일어나서 쓰러지고 회복한 생생한 체험담을 담은 책입니다. 질 볼트 테일러라는 명랑한 성격의 뇌과학자는 오빠가 뇌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뇌과학자로 커리어를 쌓아가던 37세의 어느날 아침 좌뇌에 뇌출혈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좌뇌 기능이 떨어지면서 세상과의 분리감이 줄어들고 일체가 되는 체험을 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호박사님의 저서 '나의 눈'에 나오는 깊은 체험을 일반인(뇌전문가이긴 하지만)이 뇌출혈로 겪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진지한 가운데 ..

유리알 유희

우선 아무리 의미를 되새기려고 힘써도 암기되지 않는 유리알 유희라는 책 제목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시를 짓는다거나 작곡을 한다거나 설계를 하는 등 행위에 깊게 몰입하는 상태, 그에 따라 얻게되는 기쁨 정도로 자의적 해석을 해봅니다. 요즘 들어서 바깥으로 향하던 시선들을 거둬들이며 내면의 작용을 들여다 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는데요, 이러한 저의 심리 상태와 절묘하게 맞아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헤르만 헤세라는 인물이 어떤 시대적 배경을 살았고, 어떠한 출생 신분이며 어떤 정신에 이끌렸으며 성격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를 느꼈습니다. 죽음을 피부로 절감하며 살아갔을 조상님 세대와는 다르게 풍족한 자원 속에서 자란 철부지가 되어 심도 깊은 예술가의 예술혼과 책..

무덤덤한 바게트

빵을 먹는 사람들이 있고, 만드는 사람들이 있고, 밀을 수월하게 먹을 수 있도록 빵이란 것을 고안한 지혜를 터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께서는 영혼을 통해 빵을 만드는 지혜를 내리십니다. 빵은 기본적으로 밀가루와 물과 소금과 효모(이스트)를 필요로 합니다. 소화가 잘 되는 더 건강한 빵을 만드는 사람들은 밀가루 자체에 있는 균을 활성화 시켜서 반죽에 발효를 일으킵니다. 청년 때 바구니 달린 자전거에 담겨있는 바게트는 낭만적으로 보였습니다. 더해서 자전거의 주인이 긴 머리 아가씨라면 더욱 매력적일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머리숱이 줄어들기 시작하던 어느날 구수한 풍미의 바삭한 바게트를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되었습니다. 밀가루에 물을 부어서 치대면 손가락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느낌이 좋지가 않았습니다. '..

독버섯

산에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이맘 때 아버지를 따라 송이버섯을 따러 다니곤 했습니다. 송이버섯을 발견하는 기쁨은 짜릿했습니다. 간혹 싸리 버섯, 노란 꾀꼬리 버섯 같은 식용 버섯도 따셨습니다. 아버지는 독버섯에 대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쫄깃하여 길게 찢어지는 버섯은 대부분 먹을 수 있는 것이고 툭툭 부러지거나 바스라지는 것은 먹지 못하는 것이라는 상식과 더불어 처음 보거나 미심쩍은 것은 꼭 정체를 알고나서 먹어야하고 왠만하면 그냥 두라고 덧붙이셨습니다. 간혹 독버섯을 잘못 복용하여 발생한 사고를 접하게 됩니다. 독버섯이란 단지 식용하지 못할 뿐인데 판단 미스로 인한 사고로부터 독버섯은 나쁜 것으로 꼬리표가 붙습니다. 산길을 걷다 보면 짓밟힌 독버섯을 보기도 합니다. 버섯은 식중독을 일으켰다는 오명을 쓰고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