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레팅고 이야기

환상지

opener6 2022. 11. 24. 12:57

 

원효대사님의 해골바가지 깨달음을 듣고서 처음 반응은 제가 해골의 썩은 물을 마신 것처럼 속이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해골에 고인 더러운 물을 마시는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사님께서 다음날 일어났을 때에 그 것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대목에 대해서는 아하! 하고 당장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알것도 같은 느낌은 있었습니다. 그 때 당장 아하! 했었더라면 저의 삶은 그 시점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상징과 비유와 은유에 대하여 사색을 해봅니다. 원효대사님 일화의 해골의 썩은 물이란 지금 머릿속에 든 오랫동안 고여서 썩다싶이한 고정관념들이요, 그것을 마시고 달게 느꼈던 것은 자아가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아내는 단물이요, 다음날 아침은 그러하게 살아온 삶을 인식한 깨달음이자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 말입니다. 상상력이 빈곤했을 때에는 사실을 따지지만 그것마저 시들해지면 시와 음악과 영혼과 신을 찾는 일이 남을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들 또한 상징과 비유와 은유적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를 역사적으로 사실적으로 다루다보면 예수님이란 인물에 초점을 맞추기 마련입니다. 저는 2000년 전의 예수님을 현실적으로 느끼기란 매우 어려웠습니다. 가족이라는 존재조차도 현실적인 사랑으로 대하기 어려운 판국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랑에 대해서는 삶을 대하는 태도 딱 그만큼 매우 비관적이었습니다. 

 

이것을 말로 풀어내자니 머리가 아파옵니다. 하지만 제가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 다른 이를 의식하지 않고 옮겨보겠습니다.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비이원성에 대해서 더듬더듬 공부를 하다가 보니 환상지라는 가짜 고통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팔, 다리가 잘린 사람이 없는 부위에서 통감을 느낍니다. 라마찬드란 이라는 신경정신과 의사는 거울상자를 이용해서 잘린 팔이 붙어 있는 것처럼 가짜로 보이게 만들어서 뇌신경이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들고 통감을 치료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저는 머리에 아하! 하고 불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7살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8살에 엄마가 다시 생기고, 몇 해 전에 성모님이라는 새로운 엄마를 다시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엄마들에 적잖이 대면대면한 것이 저의 감정이었습니다. 삶에 내동댕이 쳐진 것같은 상황들이 환상지에 대한 통증처럼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엄마>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벌써 안절부절하지 못했던 마음들을 꽁꽁 싸매느라 애썼습니다. 그리고 왠만한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치유가 된 사람처럼 보일뿐더러 저 자신도 그렇게 착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치유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피할 길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와 명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전히 누군가를 의심하고 비판하는 태도에 대한 내맡김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애를 먹는 상태를 계속 하는 가운데, 신께 도움을 구하거나 놓아버림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책은 겉햝기로 읽어지고 진실한 사랑의 체험은 요원하기만 할뿐더러 이생이 이대로 끝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마저 일기 때문이었습니다.

 

친어머니, 새어머니, 성모님의 합체 필요했습니다. 원망의 친어머니와 무서운 새어머니 그리고 아직 대면대면한 성모님을 통합하는 것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합체니, 통합이니 하는 단어들이 좀 그렇습니다만, 고민해보건대 저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랑을 갈구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부분에서의 기억이 환상지처럼 고통스런 감정을 지니게 되었고 스스로를 병자로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밤하늘 별빛처럼 가끔 영혼이 반짝반짝 눈을 뜨는 시점이 되면 모든 걸 이해하고 용서할 것 같다가도 마음은 이내 인색해지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찰나에는 하느님의 축복이 깃들어 있었으니, 돌아가신 엄마와 새 어머니가 둘이 아니라는 앎과 성모님 또한 진정한 영혼의 어머니라는 무의식적인 기쁨과 사랑이 저를 감싸고 있음을 확실하지만 애매하게나마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기도의 시간을 붙들고 있습니다. 

 

아까 잠시 성경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는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생각하기는 정말 싫었습니다. 그 분의 고통에 대해서 접속하면 저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게 되니까 그것에 대하여 반감이 있었던게 분명했습니다. 사랑을 받고 싶지 고통을 받고 싶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십자가는 질색팔색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무리에 대한 반감도 있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경 속 예수님에 대해서 달리 보는 시각이 생겼음을 고백해봅니다.

 

예수님이 형상이 계시다면 외부의 제 3자적 어떠한 인물이 아니라 저와 직접적 연관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이 육체화 되었을 때의 이야기고, 육체화 되기 전의 상태 즉 파동의 상태인 말씀, 에너지 등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상태를 예수님이라고 표현하면 맞을 듯 싶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지식으로 접했습니다.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대화를 주고 받는다던지 어떠한 메세지를 직접적으로 듣지 못한다고 생각을 해왔습니다. 책에서 읽은 성인전이나 누구누구를 통해서 신과 주고 받은 대화나 메세지를 간접으로 전해듣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구와 대화 하듯이 신과 대화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과의 대화가 그리 서툴다보니 신과의 대화는 얼마나 잘 이뤄질지는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사실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대화가 신과의 대화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사람이나 사물을 대하고 여기는 방식이 곧 신을 모시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직시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이제 빼도박도 못하고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지경으로 스스로를 몰아넣고 있다는 무서움이 듭니다. 지금 제 마음에는 한명의 괴씸한 대상이 있음을 밝힙니다. 아니지요, 어쩌면 한명이 아닐뿐더러 내 마음에 있는 것만 외부에 투영된다고 배웠으니 그는 나와 둘이 아닌 대상입니다. 허나, 이 모든 것이 환상지 통증의 착각임이 어렴풋하지만 분명히 알겠습니다. 그리고 좁고 곧은 길을 갈지자로 걷지 않기 위해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낍니다.

 

주님! 이리하여 드디어 주님을 부르게 됩니다. 

하여 저는 주님과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리라고, 결국 하나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어느 분의 말씀처럼 성경은 인간 개개인의 자서전이라고,

마음에 성전을 짓고 영혼 깊숙히 주님의 자리를 마련합니다.

 

환상지 속의 주님은 고통속에 머물지만

실재의 주님은 승화된 사랑으로 나타나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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