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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가방

opener6 2022. 8. 5. 12:50

짜장면을 사주셨던 할아버지는 초등학교에 입학 선물로 가방을 사주셨습니다. 빨간 색깔이었습니다. 토끼 세마리가 줄넘기를 하고 있는 영락없는 여학생용 가방이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멸공의 횟불 군가를 배우던 시절에는 파란색은 남자를 상징하고 빨간색은 여자를 상징했습니다. 떼가 통하지 않는 사정이 생긴 후라서 가방은 바꿀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놀림을 받으며 빨간 가방이 낡을 때까지 메고 다녔습니다. 

 

할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생긴 감정들을 내맡기면서 앎이 왔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나를 대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대해왔었다는 통찰이 왔습니다. 할아버지의 침묵 이면의 느낌이 들립니다.

 

짜장면

<할아버지> 홍아 다리는 안아프니? 오늘 먼 길을 걸어왔으니 내가 맛있는거 사줄께.

<나>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이 곳은 중국집이라는 곳이란다. 메뉴판을 볼까? 이 까무잡잡한 것이 올려진 것은 짜장면이라는 것이고, 기가막힌 맛이란다. 우동이라는 것도 있는데, 내가 볼 때 너는 짜장면을 좋아할 것 같다. 

<나> 잘 모르니까 할아버지께서 추천해주시는 걸로 먹을께요. 

<할아버지> 어때 맛있니?

<나> 기가 막힌 맛이네요. 할아버지 최고예요!

 

시간이 흐른 후...

<나> 할아버지 지난번에 먹었던 짜장면이 너무 맛있었어요. 오늘도 그걸로 먹으면 안될까요?

<할아버지> 그렇게 하려무나.

 

빨간 가방 

<나> 할아버지 입학 선물 너무 감사드려요. 그런데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빨간 가방이 여자 색깔이라서 마음에 안드는데 다음 장에 가셔서 바꿔주시면 안돼요? 토끼도 치마를 입었잖아요. 아이들이 놀릴까봐 벌써부터 걱정이 되네요.

<할아버지> 가방이 마음에 안드는게로구나! 그럼 다음 장에 같이 가자꾸나. 니 맘에 드는 걸로 한번 골라보자꾸나. 

(어쩌면 할아버지는 색맹이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그동안 나는 빨간 가방과 같은 것을 상대방에게 내밀지 않았었나?

짜장면을 기대하는 사람에게 우동을 건네지 않았었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지도 않은 채 자기 만족을 나눈다는 것이 상대방을 얼마나 불편하게 하는 것인가를

할아버지는 오래 전에 침묵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겪었던 불편함은 내가 남들에게 끼쳤던 불편함과 다르지 않았음을 할아버지의 영혼으로부터 깨닫습니다. 

식당의 메뉴판과도 같은 선택지로 대인 관계를 하는 것이 친절함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