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덕이는 세살이 많은 친구였다. 일곱 가구의 작은 시골 마을의 바로 대각선 윗집에 살았다. 재덕이네는 품을 팔거나 도지를 주고 남의 땅을 부쳐서 나오는 소득으로 삶을 꾸렸다. 재덕이는 형을 둘 두었고 큰 형 재호에게 자주 맞았던 것으로 기억되어 있다. 재덕이의 작은형 재운이는 나를 매우 귀여워했고, 재덕이는 나를 가끔 골려먹는 데서 재미를 느꼈던 것같다.
대여섯 살 무렵 할아버지께서 복숭아 나무를 휘어서 활을 만들고, 대나무로 화살을 만들어 주셨다. 나는 자랑을 하러 재덕이에게 갔다. 재덕이는 곧 자신도 활을 급조해서 만들었다. 그러고는 잠시 바꿔서 쏘아보자고 했다. 순진하게 건넨 활은 재덕이 것으로 둔갑을 했고, 재덕이의 활이 내것이 되었다. 재덕이는 우겼다. 그리고 계속 우겼고 활은 약이 오를대로 올라 울음을 터트리며 할아버지께 달려가기 직전에 다시 내것으로 돌아왔다.
호두를 터는 날 재덕이가 호두 줍는 것을 도우러 왔다. 재덕이의 호의가 이상스러웠지만 아버지도 계시고, 끝나고 같이 놀 생각이 먼저였으므로 재덕이와 열심히 호두를 주워모았다. 어스름한 저녁이 되자 숨겨 놓았던 한바가지의 호두를 찾아 간 재덕이를 목격했다. 아버지께 일렀지만 아버지는 재덕이를 놓아주셨다.
어느날 재덕이가 인삼을 먹으면 뽀빠이처럼 힘이 난다고 아랫동네 배씨네 인삼을 뽑아 먹자고 꼬드겼다. 어른처럼 힘을 써보고 싶었던 나와 주영이는 재덕이의 최면에 빠진 것처럼 인삼밭에 기어들어갔고 큼직한 세뿌리의 인삼을 캤다. 그리고 아이다운 발상으로 뿌리를 떼어낸 후 시퍼런 줄기와 이파리를 그냥 꽂아두었다. 며칠 지나자 배씨아저씨가 뿌리 없이 시든 삼 잎을 들고 아이들을 추궁을 했고, 그날 낮부터 저녁이 되도록 매타작 소리와 재덕이의 비명이 끊겼다 이어졌다 했다.
재덕이가 6학년, 주영이는 5학년, 나는 3학년 이렇게 셋이서 장난감 총을 사러 면소재지까지 걸어갔다. 고개를 넘고 들길을 걷다가 토마토 밭에서 토마토를 서리해서 먹었다. 남의 것을 따자니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가운데 처음 먹어본 토마토였고, 향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에는 맛있다고 못느꼈다. 납작한 총알이 연발로 발사되는 총을 하나씩 들고 신이 나서 총잡이 흉내를 내었다. 재덕이와 주영이는 누가 빨리 쏘나 내기를 걸었고 내가 심판을 보았다. 나는 재덕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므로 주영이가 빨랐다고 편파 판정을 했다. 재덕이가 나를 때린 적은 없었기에 내가 좀 까불었었던 같다. 위험을 느꼈지만 이미 늦었고 심리적 언어 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재덕이는 나를 겁박했고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 내가 똑똑했더라면 간발차이로 재덕이의 손을 들어 비위를 상하게 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재덕이는 잡은 물고기를 브이의 다이애나가 쥐를 삼키듯이 꿀꺽 넘기며 용감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3,4 학년 무렵 재덕이는 아랫동네로 이사를 갔고, 어느날 점심을 못먹고 있었을 때 재덕이가 자기 집에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밥을 준다는 재덕이가 좋아서 재덕이의 자전거 앞자리를 얻어타고 배불리 밥을 얻어먹고 돌아오는 길에 재덕이의 자전거가 넘어져서 얼굴 반쪽을 심하게 갈아부쳤다.
재덕이와의 마지막 기억은 붕어 낚시였다. 재덕이는 이사를 갔고 그 후로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떠난 재덕이네 집은 서서히 무너져 갔고 동네 아이들은 그 집을 아지트 삼아서 놀았다. 5학년이 되자 한집이 이사를 갔고, 중학생이 되자 또 한집이 이사를 가서 친구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외로움을 느끼며 사춘기를 보냈다.
재덕이는 눈 앞에서 사라졌지만 재덕이와 함께 했던 감정은 고스란하게 간직한 채 다른 재덕이들을 끊임 없이 만나왔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나의 절친 재덕이는 바글바글 했었다. 나는 시들시들 생기를 잃었다. 내가 생기를 찾는 시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재덕이에게 배운? 도둑질을 할 때 였다. 학교 과수원에 배가 익으면 친구를 꼬드겨서 죄의식을 나눠지고 서리를 했다. 흥분과 스릴 속에서 훔쳐 먹는 배는 꿀맛이었다. 사과, 복숭아, 무등산 수박, 등등. 더러는 걸려서 혼줄이 났지만 끊을 수 없는 흥분감이 도둑질에 있었다. 흥분감은 시든 상태를 금새 회복시켜주는 묘약과도 같았다.
힘을 되찾는 시기가 되자 맞설 줄 알게 되었고, 화를 내는 것에 쾌감이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걸핏하면 화를 내게 되었다. 화를 내는 것에 당위성을 부여하면서 상대의 취약점을 공격했다. 상대의 우격다짐에 꺾였던 기를 펴기 위해서.
재덕이.
내 안의 재덕이를 몰아내려고 수 많은 재덕이들과 진흙탕 싸움을 벌여왔다. 밖으로는 안그런 척하며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싸움에서 재덕이는 끈질기게 나를 쫓아왔다. 아니, 내가 재덕이를 찾은 것이다. 재덕이를 굴복시키고 싶은 욕망에 끊임 없이 굴복한 것이다.
재덕이는 어설프게 교활하고, 말도 안되게 우기고, 뜬 소문을 퍼트리고, 좀도둑질을 일삼는 천성 나쁜 아이라고 여겼다. 나를 괴롭힌다고 여겼던 많은 재덕이들.
이제 놓아 보낸다.
재덕이는 내 마음의 일부였기에.
시간이 흘러 그 시절 잘 모르고 스쳐갔던 또 다른 감수성이 소중하게 돌아오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