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선사님의 이야기 중 콧구멍 없는 소라는
말을 듣고 문득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노인께서 '소로 태어난다면 콧구멍 없는 소로 태어나지!' 라고 말씀을 하셨을때,
'길 들일 필요 없는 소로 태어난다? 좋은 발상이군!'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대목에서 소를 참나로 해석하시는 대목에서 의문이 일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소라는 존재를 에고로 해석하며 살아왔는데 소는 참나라는 말을 들었고
인테넷을 검색해봤더니 역시 소를 참나라고 하는 설명을 보았습니다.
왜 나는 십우도를 거꾸로 해석하며 살아왔을까에 대한 의문이 일었습니다.
몇해 전 네팔 여행에서 소가 밭을 가는 정겨운 풍경을 사진에 담게 되었습니다.
가까이에서 보았더니 신기하게도 소들은 코뚜레를 꿰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한마리도 아닌 두마리를 이용해서 쟁기질을 하고 계셨습니다.
코뚜레 없는 소로 밭을 가는 일이 가능한가?
의심할 새도 없이 눈 앞에서 소들은 사람의 말을 잘 따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어떻게 소를 길들여 밭을 가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릴때 지켜본 바로 소는 어른소가 되기 송아지가 어느 정도 자라면
미리 준비한 닥나무를 휘어서 코를 뚫어 코뚜레를 하는게 당연했습니다.
그때 반항하는 송아지의 눈빛은 지금도 눈에 선 합니다.
그 다음 등치가 어느 정도 커진 소는 일소가 되기 위해 훈련을 해야합니다.
카우보이가 말을 길들이듯이 소 또한 길들여져야 일을 하니까요.
그 과정에서 주인과 소는 서로 애를 먹어가며 서서히 서로를 길들입니다.
이런 광경을 심심찮게 봤던 저는 소가 일을 배우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 잘 압니다.
이 과정에서 성질이 유순한 소들은 빠르게 순응해서 일소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잘 순응하지 못하는 소들은 팔자 편하게도 배불리 잘먹여져서
우시장으로 끌려나서 다음 과정을 밟습니다.
평생 일소로 사는 것이 힘들것이라는 의견도 있겠지만
소와 사람의 관계는 남다를 어떤 것이 있습니다.
'워낭소리'라는 영화에서 소가 죽기 전 코뚜레를 풀어주는 할아버지의
씬에서 무한의 감동이 밀려왔던 기억이 납니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는 스무살이 훨씬 넘는 소는 마치
할 일 다하신 노스님께서 열반에 드시는 것과도 같은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기계라는 것의 등장 이전에 농사를 짓는 것이란
소를 놓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우시장에서도 소의 성품을 알아봤고
잘 길들여진 소는 웃돈을 얹쳐져 거래가 되었습니다.
제가 다녔던 농업고등학교 앞에는 보름에 한번씩인지 날짜는 가물가물하지만
정기적으로 우시장이 섰고 흥정하는 분들의 모습을 재미있게 관찰했었습니다.
길들여진 소와 주인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어쩌면 사람이 스스로를 대하는 법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잘 길들여진 소는 그만큼 주인이 소를 부리는 태도가 다릅니다.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는 소가 있는 반면, 잔소리를 많이 듣는 소도 있고,
많이 얻어 맞는 소도 있습니다.
소를 부릴때 내는 소리도 있는데 말 잘 듣는 소를 부리는 소리는 듣기 좋고
일하기 싫어하는 게으른 소는 불편합니다.
그런데 네팔에서 소들은 코뚜레가 없었습니다.
인도의 소들은 길거리를 누비며 주인도 없는 듯 다녔습니다.
그 쪽의 소들은 한국의 소들과 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소들은 신의 가피가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만큼 대접받는 것을 무의식 장에서 소의 영혼도 알고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 그러고서 사람에 순종하는 소들의 모습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까요?
흡사 신에 순종하는 사람처럼 사람에 순종하는 소를 보노라면
저의 에고도 소와 같이 잘 길들이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해왔던 것입니다.
십우도를 보면 소를 찾아 헤매었고
그것은 에고가 참나를 찾은 것이 아니라
참나가 문득 에고를 바라본 회광반조의 순간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견성은 했지만 남아있는 습을 닦아내는 과정이 검은 소가 흰 소가 되어가는 과정이고
더 나아가면 참나와 소가 혼연 일체가 되다가 나중에는 소마저 잊은 상태로
진행되고 소를 통해 아이는 깨달음을 얻으니
소가 바로 에고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풀어놓고 나니 대승 차원에서 에고 또한 공하므로
소를 참나니 에고니 분별해서 볼 필요도 없어지는 듯 합니다.
경허선사님께서 촌로님께 들은 '콧구멍 없는 소' 라는 말씀은
인도의 길거리를 노니는 자유로운 소의 몸으로 세상을 경험할 수도 있고,
드센 에고를 어렵게도 길들인다.라는 일침일 수도 있고,
다음 생엔 참나과 바로 하나되는 에고로 태어나야지! 하는 말씀일 수도 있고,
또한 수행하는 이들에게 온마음을 전달하는 에너지로
스승께서 보내오는 큰 사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3년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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