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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나방

한 밤중에 시렁에서 누에가 서걱서걱 부지런히 뽕잎을 갉는다 꼼질꼼질 요란도 하다 그것 밖에 모르는지라 어느새 손가락 만큼 부둥부둥 하게 징그럽던 녀석이 숨 죽여 곱고 질긴 비단실을 게운다 쉼 없이 세심하게 실을 잣는다 미련 없이 입장 없이 알맞게 지은 고치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조바심을 잠재우고 이전의 모습을 잊히우고 꿈에서 깨어나면

친구의 과자

친구가 빵을 구웠다. 그런데 빵이 아니었다. 빵은 글루텐이 잡혀서 질긴데, 친구가 구운 빵은 폭신한 것이 사르르 녹았고 카스테라처럼 찐득거리지도 않았다. 다양한 견과류와 곡물들을 넣었고 계피 향이 살짝 났다. 내가 딱 좋아하는 식감과 맛과 향으로 먹는 동안 행복했다. 어때? 기가 막힌데, 정말 맛있고 식감도 좋아. 어떻게 만든거야? 비밀이야. 그런데 말이지. 이렇게 맛있는 것을 만들고 먹는 것에 대한 애착과, 세상에 대해 초연해지는 것에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 나의 눈은 유럽 대성당의 멋진 건축물을 동경하는데, 지금 다니는 성당은 예술성을 기대할 수가 없네. 이처럼 입이 미식을 탐하는 것에서 어떻게 거둠 기도와 연관을 지을 수 있을까? 흠뻑 빠지면 홀가분하게 나올 수 있지! 마음이 지금에 없고 딴 데 있..

어둔 밤

어둔 밤 -십자가의 성 요한- 1 어느 어두운 밤에 사랑에 타 할딱이며 좋을씨고 행운이여 알 이 없이 나왔노라 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 2 변장한 몸, 캄캄한 속을 비밀 층대로 든든하이 좋을씨고 행운이여 캄캄한 속을 꼭꼭 숨어 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 3 상서로운 야밤중에 날 볼 이 없는 은밀한 속에 빛도 없이 길잡이 없이 나도 아무것 못 보았노라 마음에 속타는 불빛밖엔 4 한낮 빛보다 더 탄탄히 그 빛이 날 인도했어라 내 가장 아는 그분께로 날 기다리시는 그곳으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그쪽으로 5 아, 밤이여 길잡이여 새벽도곤 한결 좋은 아, 밤이여 굄하는 이와 굄받는 이를 님과 한몸 되어버린 괴이는 이를 한데 아우른 아하, 밤이여 6 꽃스런 내 가슴 안 오로지 님 위해 지켜온 그 안에 거기 당신이 잠드..

카테고리 없음 2022.11.28